“대형·인기 연구과제 우대가 학문다양성 망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대구대분회 작성일20-11-02 03:51 조회4,371회 댓글0건본문
기고: 학술진흥재단 정책 비판
2006년 04월 15일 허남혁 대구대
▲허남혁 / 대구대·지리학 박사과정 ©
지난 3월 중순 한국학술진흥재단(이사장 허상만, 이하 학진)이 올해 학술연구조성사업계획을 발표했다. 박사과정생으로서 내 최대의 관심은 과연 올해 초에 암묵적으로 흘러나온 인문사회과학 박사과정 학생에 대한 지원사업(‘신진연구인력장려금’)의 폐지가 확정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폐지가 확정되었다. 해마다 7백20만원씩 박사과정 논문집필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지원되던 사업이 올해부터 이공계 쪽은 ‘문제해결형지원’ 사업이라는 신규사업으로 분리되어 나가고, 나머지 인문사회 쪽은 소리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왜 없앴느냐고, 인문사회과학 박사과정생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냐고 질의를 넣는다면, 학진 관계자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박사과정 학생들은 BK21이나 학진 인문사회기초연구과제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 지도교수의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하면 매달 일정한 금액이 지원되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대답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BK21이나 인문사회기초연구과제를 딸 수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 일부 학교, 일부 전공의 학과들 뿐이다. 나머지 곳들은 학교의 여건상, 또는 전공분야의 주변성으로 인해 불가능하다. 그나마 적은 액수이긴 했지만 ‘신진연구인력장려금’ 사업은 자신의 연구주제로 박사논문을 쓰는 박사과정생에게 위안이라도 되는 금액이었는데, 더 늘리지는 못할망정 그마저 없애버린 현재 학진의 정책과 그 논리는 금전적인 비전을 보장하는 주류 학문과 그렇지 못한 비주류 학문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이러한 양극화의 문제는 한 전공분야 내에서의 다양성 상실과도 직결된다. 학진에서 올해부터 논문사후지원제를 시행하면서 대형 다년과제는 많이 줄이겠다고 발표한 바 있으나, 이공계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여전히 대형과제 우선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물론 개인의 힘으로는 진행하기 어려운 소수의 대형 장기과제에 대한 지원은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다. 하지만 같은 돈이라면 다수의 소형 개인과제를 지원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초학문의 발달과 창의적인 연구를 활성화시키는데 더 중요하리라고 생각된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주제를 가진 연구자들이 골고루 수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확을 목적으로 하는 획일적인 단작으로 농업 생물다양성이 줄어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필자의 주 관심분야가 학문적으로는 매우 주변에 있지만 사회적인 관심은 점차 높아져가고 있는, 농업과 먹거리의 지리학이다), 한 나라의 지적 역량을 보여주는 학문 생태계의 종 다양성 역시 가시적인 성과에 목을 매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연구자들이 사회적으로 인기 있고 금전적으로 매력 있으며 진로가 보장되는 특정 분야에 몰리는 현상이지, 절대적인 연구자의 숫자가 부족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기가 없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수요가 발생하는 각각의 분야에 전공자들이 적절하게 분포되어 있지 못한 연구자의 다양성 결핍의 문제 말이다.
특히 농업생물다양성의 시작이 종자의 다양성에 있듯이 학문 생태계의 다양성은 대학원생들의 연구주제와 분야 선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대학원생들의 개인연구 지원을 통한 생활안정은 결국 장기적인 학문생태계 다양성을 보장해 주는 첫 단추이다. 결과적으로 학진의 정책은 연구자 생애주기의 첫 시작점부터 비주류 학문분야 전공자들을 탈락시키는 결과를 완화하긴 커녕 쏠림현상을 더욱 부추길 뿐이며 이는 학진이 표방한 “연구자 생애주기를 고려한 맞춤형 사업구조”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필자가 경험했던 캐나다를 비롯하여 미국이나 영국 등 어느 나라에도 석박사과정 대학원생에 대한 개인연구 지원제도가 없는 나라는 없다(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라면 대학원 공부 중에 해마다 계속되는 지원제도의 혜택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는 점을 학진은 지금이라도 인식하고 내년부터 새로운 제도 시행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2006.04.21 18:4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