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는 없다-한겨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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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구대분회 작성일20-11-02 13:05 조회4,462회 댓글0건본문
김미영 고려대 사회학과 강사
나는 거짓말쟁이다. 나는 위장취업(?)을 했다. 모든 대학이 방학에 들어간 지 두 달째, 지금 한국에 대학강사라는 직업 신분은 존재할 수 없다. 내친김에 더 고백하면 무슨 학교 무슨 과라고 마치 소속된 양 쓴 것도 잘못이다. 강사라도 고대 강사면 뭐 좀 낫나?
강의를 하지 않을 뿐 나의 일상은 방학 전과 같다. 책과 씨름하기. 학기 중의 그것은 빈약하게나마 직업 활동이었으나 지금은 한갓 호사 취미다. 아니 그때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만 팔렸을 뿐이다.(리포트 시험 채점, 학점 산출 등에 걸리는 시간은 무료로 해 주지 우린 그런 거 쩨쩨하게 계산 안 한다.) 부분적으로 팔리듯 부분적으로 먹었으면 좋겠다. 띄엄띄엄 팔리듯 띄엄띄엄 숨 쉬면 좋겠다. 안 팔리면 안 먹으면 되고, 일 없으면 겨울잠 자면 되고.
강사는 15주 단위로 신분이 갱신되고 시간 단위로 노동력이 팔린다. 다음 학기 수강신청 기간에 학과 조교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으면 ‘짤린’ 것으로 알아먹는 ‘15주살이’들은 당연 어떤 구성원이 아니다. 노동조합? 교원단체? 원천적으로 난센스다. 대단히 훌륭하신 노무관리다. 또 노동과정론에서 말하는 ‘노동의 틈’, 자본가로서 보면 ‘시간도둑’이 봉쇄된다. 일 안 하고 빈둥거릴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대단히 간편하신 노동 감시다.
한 시간 강의를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고 징징댈 이유 없으니 자본은 노동력을 대체로 그렇게 산다. ‘혈혈단신’ 노동 기계에 원하는 시간 단위만큼 ‘코인’을 집어넣어 ‘빡세게’ 돌리면 될 뿐, 노동력의 재생산(먹고 자고 쉬어 힘을 재충전함)과 노동의 재생산(자식을 낳아 길러 젊은 노동력을 공급함) 활동을 모두 고려해 노동력 가격을 정하는 자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고로 노동력으로서의 인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단속적 현재만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대학 강사의 경우 황감하게도 그의 과거가 돌보아진다. 박사학위를 딴 영광스런 과거가 고려되어 “비정규직도 되지 않는 말하자면 일용잡급자”로 분류된다. 비정규직이기엔 너무 유식하신 그대? (이것도 모르고 비정규직보호법에 걸릴까봐 ‘장기 근속한’ 나를 인쇄 공문 한 장으로 짜른 모 대학, “공부하세요!”)
나는 생존분투를 벌이다 자살한 강사들 사연을 얘기하지 않겠다. 의사파업 직후였나, 강사 처우 개선 요구에 어떤 누리꾼이 저 좋아 한 공부에 왜 의사도 강사도 높은(?) 일정 수입을 나라가 보장해 주어야 하느냐고 썼던데, 그 말도 맞다. 시장 경쟁에서 망하는 의사가 있을 수 있듯 ‘교포박’(교수가 되기를 포기한 박사)이 있는 것 당연하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전공 교수만큼 인간문화재 수준으로 수요를 줄여놓는 거 아니면 자연스런 수급 불균형을 타박할 이 없다. 그러나 대학 강의의 절반(!)을 담당하면서 교원 자격도 보장받지 못하는 ‘초법적인’ 강사들이 집단적 제도적으로 온존되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더욱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것은 박사든 안 박사든 당연할 수 없다.) 그 문제 제기는 구제의 탄원이 아니라 정의의 요구다.
일말의 일관성을 요구한다. 필요하면 (교원으로) 대우하고 대우하기 싫으면 의존하지 말라. 신분적 구분과 차별에 기반한 대학, 약한 자들을 이용해 재정파탄을 모면하는 대학, 그것은 학문 공동체인가 학문 식민제국인가. 청빈 속에 공글려진 ‘빈곤의 철학’은 학문세계를 풍부하게 하겠지만 생존의 필연에 목매단 ‘철학의 빈곤’은 그것을 황폐하게 할 뿐이다. 국회 앞에는 340일 넘게 천막농성을 하는 ‘비정규 교수’들이 있다.
2008.08.1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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