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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 문화역사기행 신청 공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대구대분회 작성일20-10-10 20:18 조회9,346회 댓글19건

본문

2018학년도 1학기 문화역사 기행 공지

 

 

2018학년도 1학기 개강을 맞아 조합원 여러분들의 단합과 유대를 강화하고자 문화역사 기행’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참가 바랍니다.

※ 이번 행사는 3월 운영위원회 결정에 의해 조합원에 한하여 참석이 가능합니다. (가족 및 지인 동반 불가)※

 

1. 일 자 2018년 3월31() 

 

2. 장 소 : 전남 담양군 일대

 

3. 출 발 장 소 시지맥도날드 7:20 / 반월당 현대백화점앞 7:40 / 성서홈플러스 8:00

 

4. 세부 행사일정

일 정

시 간

내 용

출 발

07:20

 시지 맥도날드

07:40

 반월당 현대백화점 앞

08:00

 성서 홈플러스

담양군 일대

 

10:00 ~ 12:30

 명옥헌원림 창평삼지천슬로시티 한국가사문학관

12:30 ~ 14:00

 중식

14:00 ~ 16:00

 소쇄원 메타프로방스메타세콰이어길

16:00 ~ 18:00

 죽녹원*이이남아트센터 담양관방제림

18:30 ~ 19:30

 석식

22:00

 대구도착

 

   - 행사일정은 당일 현지사정에 따라 변경 될 수 있습니다.

5. 참가 대상자 대구대분회 조합원 ★선착순 25명★

 

6. 신청방법 :

신청기간 3월 28(수) 17:00까지

신청방법 홈페이지에 댓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전화신청은 받지 않습니다.)

 

※ 기타 문의사항은 대구대분회(850-5767~8)로 연락 바랍니다.

 

2018년 3월 21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대구대분회 

 

 

2018.03.21 14:11

댓글목록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홍수영  2018.03.21 16:15
홍수영 참석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블곰  2018.03.21 17:11
참석 시지출발 이윤호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김영경  2018.03.21 17:15
김영경 (현대백화점앞)참석합니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최민수  2018.03.21 17:20
최민수 참석ㅡ반월당.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거북이  2018.03.21 17:42
임경희 (현대백화점), 강순심 그리고 안현영 교수님(시지) 출발 참석 합니다. 반가운 얼굴들 보겠네요.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솜사탕  2018.03.21 18:20
참석-성서 홈플러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이주희  2018.03.21 18:28
시지에서 탈게요. 감사합니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심도희  2018.03.21 18:36
심도희 홈플에서 타겠습니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조현구  2018.03.21 19:45
조현구 참석임다 시지 탑승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松河海照李翰邦  2018.03.22 12:00
이한방.성서홈플러스에서 탑니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김영조  2018.03.22 12:04
김영조 참석 시지 맥도날드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대구대분회  2018.03.22 16:18
강순심 참석 시지 맥도날드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서원식  2018.03.23 00:41
서원식 참석 - 반월당 현대백화점 앞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조병렬  2018.03.23 16:05
조병렬 참석 - 시지 맥도날드/ 감사합니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정용달  2018.03.24 09:55
시지에서... 정용달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이상진  2018.03.26 13:22
이상진 참석합니다. 시지에서 뵐게요. 항상 감사합니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대구대분회  2018.03.28 11:06
박원배 성서 홈플러스에서 탑니다

대구대분회님의 댓글

대구대분회 작성일

松河海照李翰邦  2018.03.31 00:04
한국비정규교수노조 대구대분회 답사 18.3.31
*호남; 호강(금강) 이남/호남평야(김제 만경강/동진강)/나주평야 영산강右道/섬진강左道
호서:의림지/영남;하늘재죽령조령/관동;철령관/영동;대관령/전라;광주남원/충청;공주홍성
광주 나주 장성 창평/기대승 박상 김인후 고경명 정철/정개청 이발 윤선도

1) 마한 백제 후백제 견훤
2) 훈요십조; 현종 때 경주서 발견/오다련 박영규 최지몽 신숭겸
8조 차현(車峴) 이남의 인물은 조정에 등용하지 말 것." 차령 이남의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역모의 기상을 품고 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 背山逆水
호남 차별의 근거로 언급하는 경우도 많은데, 실제로는 후백제의 잔존 세력을
견제하라는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근 현대의 지역 차별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다.
*훈요십조 위조설; 일본의 이마니시(今西龍) 같은 학자는 이 훈요십조의 내용은 경상도인이 造作하였으리라는 학설을 낸 바 있었으나, 그 뒤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서 태조 자신이 쓴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定說로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다. 王建時代부터 지금의 전라도를 차별 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日本人과 그 제자들이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해서 만든 말이다.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훈요십조 제8조 호남 기피에 얽힌 비밀〉,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87~94쪽
3) 정여립 기축옥사(1589년); 정개청 이발(윤선도 父의 고종)-정철
4) 임진왜란 호남의병(若無湖南 是無國家) 5) 동학농민혁명
*호남향우회 해병대전우회 고대교우회/김헌창 견훤 훈요10조 정여립란 동학 風前細柳
背信 變身 天才 藝術家 한민당 지주 박정희 김대중 5.18 홍어 전라디언
장성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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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왕국(화순 부안)/마한과 신미제국 반남고분군 옹관문화 전방후원분 흙 마한 철 백제/마라난타 법성포 도갑사 불갑사/명촌 구림(왕인/도선)/장보고 청해진/후백제 운주사 미륵
용화/훈요십조/나주 오다련女 御鄕 고려 남인 동학반대/고려청자 강진/항몽 삼별초난/
수선사와 백련사 불교개혁운동/지리산 저항 반항/김굉필 조위-조광조 기묘사림/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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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담양+창평(孔子 고향 곡부 궐리 魯 洙泗 尼丘)
朱子(운곡 고정 화양 閩 建陽 우계 창주)
2.김자수,1455년-孫壻 덕풍 이씨 德峰 이경李儆-사위 학봉 고인후-11대 冑孫 고광순
의병장// 고정주-김성수/송진우 이병로
3.정자;殿堂閤閣軒樓亭齋臺 유교문화경관(종가 不遷位祠堂 서당 서원 亭子 정려각 재실)
宮苑(창덕궁 禁苑) 鄕苑(광한루) 別墅정원(소쇄원 부용동 세연정) 산수정원
官防堤林(부용당 성안의-계서당 성이성/이몽룡) 가사문학관
4.대나무 죽제품/ 슬로시티(슬로푸드, 발효식품)/
5.메타 세콰이어(영화촬영 逆鱗) 메타프로방스/ 죽녹원 이이남아트센타/관방제림 국수거리

1)獨守亭(두문동72賢 瑞隱 全新民-천안/北向/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수양산)
2)면앙정(지지당 송흠,박상 박우-송순1493-1583신평송씨 양산보와 이종) 상수침 퇴계 김인후 신광한 기대승 고경명 이이 정철 임제/불우헌 정극인 상춘곡-면앙정가/回榜宴급제 60주년 87세/정철 고경명 임백호/寬容과 大道,퇴계 完人

3)소쇄원(양산보1503-57 2고암 양자징1522-96/기묘사화 조광조;하서 김인후48詠/고경명 유서석록,광주목사 갈천 임훈/소쇄원도/광풍각 제월당 주돈이/讓渡 移徙 祭祀)

4)명옥헌(三顧-능양군/명곡 오희도1583-1623-4子장계오이정1619-55배롱나무)繫馬行은행
5)환벽당(沙村 김윤제 외손서 정철,자미탄) 서하당(김윤제의 從姪김성원1525-97/芙蓉堂)

6)식영정(눌재 박상1474-1530,박우-文科 석천 임억령1496-1568 을사사화/김성원/
기대승1527-72/고경명1533-92/정철1536-93//송순 김윤제 김인후 양산보 박순 윤구
백광훈 송익필 김덕령) 무등산 원효계곡 창계천(창암천 자미천) 星山

7)송강정(죽록천 별칭/臨汀/인종 귀인 계림군부인,조부 산소 16세, 1584, 지실 정홍명)

8)수남학구당(향적寺-三峰書舍-양자징 정홍명, 1570년 25가문)/
수북학구당(1473朴南陳,1709金李禹丁)/ 9)취가정(충장공 김덕령)/ 풍암정(김덕보)

10)죽림재-조수문1426, 소산정 관수정 관가정 만옹정 동강조대-昌寧曺 분향리 잣정//
11)연계정(신재 최산두 김안국-미암 유희춘,하서 김인후) 모헌관
해남 5현(임억령 유희춘 윤선도)/

12)몽환각(李緖 태종 5세손,양녕 증손자/樂志歌/ 대덕면 매산리)/
13)대자암-추재 김자수1438-1510; 손서 덕풍 이씨 덕봉 이경-사위 학봉 고인후 상월정; 월봉산 창흥의숙 춘강 고정주; 3성 3평(장성 곡성 보성 함평 남평 창평)
14)獨守梅,환벽매,지곡리 지실 계당매 와룡매/분향리 잣정/대덕면 매산 몽환각/장산 모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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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림의 학맥
1.김굉필-최산두,유계린,윤신,유맹권,최충성—김인후,유성춘,유희춘
2.최부-윤효정,임우리,유계린,羅 日+至-윤구,尹巷 尹行尹復,유성춘,유희춘-이중호-이발 이길
3.송흠-양팽손,나세찬,송순,안처성-양응정,김인후,임형수
4.박상-송순,임억령,정만종,채중길,박순
5.일재 이항—김천일,기효간,김제민,백광홍,변사정
6.김안국—김인후,유희춘
7.서경덕-박순 정개청,정여립/이중호—이길 이발/노수신 윤행 윤의중 박응남 박응복 유희춘

*송순계열; 광주 장성 담양 창평--전라좌도(박상 박순),김인후 유희춘 고경명 정철
서경덕 계; 나주 화순 함평 해남--전라우도/나덕준(경현서원 미암서원) 조대중 정개청(함평 자산서원) 이발(강진 수암서원) 윤선도(녹우당 보길도 금쇄동)/박광전 기대승

*정암 조광조,일재학안,하서학안,고봉학안,노사학안,간재학안
*박종홍 교수;김인후 기대승 강항 기정진

*지방관;김종직-최부 처향 해남 거주—사위 유계린 라질/윤효정 임우리
**유배; 김굉필-기묘명현 최산두 동복 유배 도원서원 배향/유성춘 윤구 호남3걸
조광조 양팽손 기준 최산두 기묘4학사
**교제 서신;퇴계 고봉

*호남의병 정철—고경명 김천일 최경회 변사정
서경덕 정개청 계열—이순신 이복남 부대

*호남5현; 김인후 유희춘 기대승 이항 노진(함양 개평리/남원 기묘사림 안처순女)
안방준은 스승 박광전을 호남5현;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미암 유희춘-------------------------------------------------------------
*임란 이전 전남지역 서원
순천 옥천서원(1564, 1568사액/김굉필 유배지)
능주 죽수서원(1570 창건 사액/ 조광조 적려지, 양팽손)
광주 월봉서원(1578 창건, 1654년 사액)(기대승 박상 박순 김장생 김집)
나주 경현서원(1584 창건, 1603년 사액/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奇大升·金誠一/
남인계 서원; 미천서원(허목,채제공)/서인(노론)계 서원; 월정서원
장성 필암서원(김인후 양자징<소쇄원 양산보子>)

**세조 즉위 반대 낙향 가문; 광주 충주박씨,담양 문화류씨,장흥 진주정씨,고흥 여산송씨/송흠, 김종직제자 최부//기묘명현;박상 최산두(광양) 양팽손,기진 기준,윤구 송순/박상-송순 임억령/김굉필-최산두-김인후<정철 기효련 양자징> 유희춘/송흠-양팽손<정철 백광훈 최경회> 나세찬 송순/정개청 나사침 父子 이중호-이발 형제(퇴계,김안국 화담문인)/강항 일본

**임란 호남 의병장; 광주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나주 김천일, 화순 최경회, 광주 김덕령, 보성 임계영 박광전, 광주 기효증, 박광옥/
임란 호남 의병지도자 450명; 문과 30명, 사마 53명, 무과 71명

*최부1454, 송흠1459, 박상1474, 최산두1483, 김정1486, 양팽손1488, 기준1492
송순1493,윤구1495,임억령1496,나세찬1498,송인수1499,이항1499,양산보1503,김인후1510,유희춘1513, 양응정1519, 박순1523, 기대승1527, 정철1536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조위 조광조 신잠 이언적 이황 노수신 김성일
담양부사 박상(임억령/송순-정철) 순창군수 김정 廢妃愼氏복위상소/기묘사화 정암 능주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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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호남의병/유형원 이익 호남실학 정약용 위백규 황윤석 하백원 신경준 나경적
오달운 이윤성/동학농민전쟁/대한제국말 의병/태인 무성서원 정극인 상춘곡-윤선도
어부사시사/舊鄕 新鄕, 士族과 鄕族, 元儒 別儒, 嫡庶鄕戰/유배자 정약용 윤선도 노수신/
김굉필(순천), 조광조(화순) 백인걸(나주) 송시열(강진) 민정중(장흥)김수항(진도 영암)
김창협(영암)이건명(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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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1493-1582 1519문과 시험관 조광조 김일손 이후 최고 문장-기묘사화 담양낙향/1558년 10월 퇴계 이기이원론과 고봉 이기일원론 8년간 4단7정 기준1492-1521 사대부 처신 (幾 勢 死 기미 살펴 의리 맞게 시세 알아야 죽음 道/천년목사고을 나주/유배 정도전,김굉필 유배, 김안국 전라도관찰사/ 정암 능성유배 양팽손 양응기/박상 최산두 양팽손 기묘사림/송순 계열-김인후 나세찬 기대승 유희춘 정철 고경명 김천일/서경덕 계열의 정개청 이발/기축옥사/윤선도 윤휴 허목 근기남인과 연결/김안국감사-열살 김인후(최산두 박상 송순 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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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평 삼지내마을; 고경명1533-92 고종후 고인후/김인후 기대승 정철/ 임억령, 김성원, 정철 식영정 사선(四仙)/이이 정철 조헌 윤두수 백광훈 양대박 교유/고경명은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이 의진이 호남연합의병이다. 고경명은 맹주로 추대되었고 유팽로와 안영, 양대박 은 종사관이 되었다. 최상중 양희적 양사형이 모량유사로 활동하였다. 고경명은 30일만에 6000명의 의병을 모아 의병군을 편성하였다. 그는 의병군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해 전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馬上檄文을 보내어 의병대열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국운이 비색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령이나 관군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도망치기 일쑤니 어찌된 일인가. 신하로서 왕을 잔학한 왜적 앞에 내버려둔단 말인가. 각 읍의 관군 수령 민중들이여 무기를 들고 군량을 모으며 모두 분연히 일어설 때다. 구국을 위해 다 함께 목숨을 걸고 앞을 다투어 나설 줄로 믿는다.’ 유팽로가 고경명에게 피할 것을 권했으나 고경명은 이를 거부하고 적과 싸우다가 선봉장 유팽로, 후군장 안영, 고인후와 함께 순절하였다. 비록 고경명의 의병부대는 왜군을 격퇴시키는데 실패하였지만 왜군도 그 피해가 적지 않았다. 왜군은 금산전투 이후 호남 진입을 포기하고 경상도로 후퇴하였다.금산 전투에서 고경명의 순절이후 호남 지방에 의병봉기가 연이어 이어졌다. 고경명의 큰아들 종후가 의병을 일으켰고 능주(화순)에서는 최경회가 전라우의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 박광전을 중심으로 해 전라좌의병을 일으켰다. 남원에서는 변사정이 주도하여 의병이 일어났다. 한편 고경명의 거의 소식을 접한 선조는 고경명에게 공조참의를 내려주고 초토사(招討使)를 삼았다. 그러면서 선조는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선조의 고경명에 대한 기대는 금산전투에서 고경명이 패배함으로써 이루지지 못하였다. 고경명의 충열과 의에 대한 평가는 선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솔선하여 적과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공은 성취하지 못하였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백성들이 그의 충렬을 칭송하며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고경명의 의병봉기와 그 충성심을 칭송하였다. 고경명은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는 광주의 포충사(表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고경명의 일가는 임진왜란시에 의병대열에 참가하였다. 그의 동생 경신(敬身)은 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러 제주도에 갔다 오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했다. 또 그의 다른 동생 경형(敬兄)은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 고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는 32세로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그리고 그의 큰아들 종후(40세)는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숙부 경형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의 막내아들 청사(晴沙) 용후(用厚)도 아버지를 따라 의병부대에 합류하러 하자 고경명은 “너는 나이도 어리고(당시 16세), 집안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타일러 집에 머물게 하였다. 고용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가문의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여 후세에 남겼다. 무청사(無晴沙)면 무제봉(無霽峯) 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고경명의 막내아들이 있었기에 고경명의 문집과 행적이 세상에 알려졌다는 의미이다. 고경명의 유고집으로 『제봉집(霽峯集)』, 『제봉속집(霽峯續集)』 『제봉유집(霽峯遺集)』 『유서석록(遊瑞石錄)』 『정기록(정기록)』이 있다. 정기록은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킨 후 각 지방에 보낸 격문과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포충사 광주시 남구 원산동. 광주기념물 제7호. 임진왜란때의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 종후·인후 3부자와 유팽로·안영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고경명 선생비 충남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충남문화재자료 제28호/광주는 義鄕이자 藝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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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 객사 금성관 고려 성종 22년 983년 12목(5군 11현) 1018현 8목
전패 궐패 망궐례 조선시대 읍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김천일의병장 출병식-명성왕후 빈소-동학 금성토평비--일제 나주군청
객사 正廳 서원 사당 향교 대성전 제사 기능 맞배지붕
翼舍 강당 명륜당 교육 기능 팔작지붕 동익헌 당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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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의 활동> [출처] 고경명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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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의 철폐령(1871년 신미년)에서 제외된 서원27 사우 20개소
경기도 개성 숭양서원 ·김포 우저서원 ·용인 심곡서원 ·양성 덕봉서원· 파주 파산서원 ·고양 기공사 · 여주 강한사 ·과천 사충서원, 노강서원· 강화 충렬사· 광주 현절사 ·포천 용연서원
충청도 연산 돈암서원 ·홍산 창렬사 ·노성 노강서원(윤황 윤증) ·
청주 표충사(이봉상 남연년 홍림 1728/이인좌란) ·충주 충렬사(임경업)
전라도 태인 무성서원 · 장성 필암서원 · 광주 포충사(고경명 류팽로 안영)
경상도 순흥 소수서원 ·선산 금오서원 ·현풍 도동서원 ·상주 옥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
안동 병산서원 ·예안 도산서원 ·동래 충렬사 ·상주 흥암서원 ·진주 창렬사 ·
경주 서악서원, 옥산서원 ·고성 충렬사 ·거창 포충사
강원도 김화 충렬서원(홍명구 丙子) · 영월 창절서원 · 철원 포충사(김응하)
황해도;배천 문회서원 · 장연 봉양서원(박세채) · 평산 태사사 · 해주 청성묘
함경도; 북청 노덕서원(이항복 김덕함 정홍익 민정중 오두인 이상진 이세화)
평안도; 영유 삼충사(제갈량 악비 문천상) · 안주 충민사(남이흥1627) ·
영변 수충사(휴정) · 평양 무열사(석성 이여송 양원) · 정주 표절사(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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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고영진,2007, 호남 士林의 學脈과 思想,혜안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2006, 영산강문화권, 역사공간
김선기,2003, 호남정신 뿌리 깃든 전라도 정자기행, 보림
한국문화유산답사회,1995, 답사여행의 길잡이 5, 돌베개
전라남도·호남문화연구소 엮음, 전남 향토문화 백과사전,2001
목포대학교 박물관·전라남도, 전남의 서원·사우,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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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라”-호남 3천재 학자-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는 호남 3천재로 호칭되던 학자의 한 사람이다. 누구에 의하여 호칭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오래 전부터 조선왕조 중엽 이전에는 호남에 3걸(傑)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3천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높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문학이나 학문에 큰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하게 생을 마쳤던 사람들이 3걸로 호칭된다. 화순의 동복에 살았던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1483~1536), 해남의 柳成春 :유희춘의 형; 최부 외손자), 고산 윤선도의 증조부인 귤정(橘亭) 윤구(尹衢 :1495~1542)가 바로 그들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옥당 벼슬에 호당에 들어간 명사들이었으나, 사화(士禍)에 좌절하고 말았기 때문에 세 걸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남 3천재는 순창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申景濬 :1712~1781), 고창의 이재 황윤석(臣頁齋 黃胤錫 : 1729~1791), 존재 위백규가 그들이니 바로 18세기의 한 세기를 살아가면서 조선 후기의 찬란한 실학이라는 학문을 꽃피운 3대 천재 실학자들이었다. 신경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에 올라 세상에 큰 이름을 날렸으나, 황윤석과 위백규는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학문적 업적 때문에 임금의 은혜로 시골의 재야학자로서는 그래도 낮은 벼슬이나마 역임할 수 있던 행운을 얻기도 했었다. 오늘날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언급하려면, 의당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기호지방에 근거지가 있던 분들이 거론되는데, 유독 호남의 3천재는 호남이라는 시골에서 특별한 실학관계 학문의 연원도 없이 자생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문에 도달했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빛나는 업적으로 다루게 된다. 위백규와 황윤석은 비슷한 연배로 서로 교류까지 하면서 학문을 논하였고, 기호학계 성리학의 대가들의 제자이기도 했다. 위백규는 병계 윤봉구(尹鳳九 :1683 ~1767)의 문인으로 성리학에도 밝았지만, 시대적 진운에 눈감지 않고 실학에 전념했던 학자였다. 이재 황윤석은 미호 金元行이라는 노론계洛論 성리학자의 제자로 실학에 큰 업적을 남겨 이채로운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훈요십조와 지역감정 <2001/06/22 18:23>

한국 현대사가 안고 있는 아픔이 어디 한 두 가지 일까만은, 아직도 우리에게 애물처럼 달려 있는 것은 지역감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역감정이란 동서고금의 어느 곳에나 있었던 것이라고는 하지만 특히 우리의 경우에는 그 골이 너무 깊어 많은 사람의 가슴에 멍울지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호남 기피였다. 이 문제는 사회과학자들의 오랜 쟁점이 되어, 누구는 박정희(朴正熙)의 개발 편중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긴 훈요십조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하면서 그 8조에서 내가 죽은 후, 차현(車峴) 이남과 금강(錦江) 아래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고려사 태조 26년 4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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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분회 작성일

松河海照李翰邦  2018.03.31 00:04
이러한 차별의 근거는 호남이 배산역수(背山逆水․ 임금이 있는 반대쪽으로 산맥과 물이 달린다)의 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왕건이 남긴 이 유언은 제도적 차별도 정당화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적 차원에서 호남인들에 대한 편견을 유발했다. 풍토적으로 볼 때 백제의 유산을 받아 이지적이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감적인 호남인들은 이로 인해 깊은 내상(內傷)을 입었다. 그런데 이 배산역수의 논리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의혹이 있다. 여러 문헌으로 미루어 볼 때 왕건이 정말로 훈요를 남겼는지, 그것이 꼭 10조였는지, 그리고 그 8조에 호남 기피의 조항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훈요십조가 의심을 받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고려사 태조편 원본 소실▼
첫째,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 태조 편에 훈요십조가 기재된 경위에 의혹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사 태조 편이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崔齊安)이라는 인물이 최항(崔沆)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고려사 열전 최승노․ 제안 조)

최항은 경주 황룡사(黃龍寺)의 중창(重創)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서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 초기의 중신이었던 최승노(崔承老)의 손자이며, 최승노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 벼슬을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私家)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둘째, 왕건이 그러한 유언을 남길 만큼 백제인들을 미워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고려사를 살펴 볼 때, 왕건이 이 훈요 8조대로 호남인들을 관직에서 배제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1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며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백제를 미워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왕건이 견훤(甄萱)과의 원한 관계로 인해 호남을 미워했을 개연성도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정황을 보면 그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청주(淸州) 일대의 저항 세력이었지 지금의 호남 세력은 아니었다.

▼왕건 호남인 곁에 두고 중용▼
오히려 호남인들 중에는 당시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道詵國師)와 살아서는 상주국(上柱國)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崔知夢)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妃)이자 2대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吳)씨는 나주인이었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승주(昇州) 태생의 순천(順天) 박(朴)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곡성(谷城) 사람이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唐津) 사람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 사람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다.

▼거란 침입 때 현종 되레 전주 피난▼
셋째, 고려 왕실이 그토록 호남을 기피했다면 거란의 침입 당시에 현종(顯宗)이 굳이 호남으로 피난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는다. 즉, 고려사(현종 2년 정월 기해 조)에 의하면 거란의 침입 당시 현종이 전주(全州)에 7일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왕건의 훈요십조가 사실이고 또 후손에 대한 훈요십조의 영향력이 그토록 강력했다면 왕은 영남이나 강원도로 피난했어야 옳았지 호남으로 피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째, 훈요십조와 호남 기피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풍수지리설의 견지에서 볼 때 금강이나 차령산맥이 개경(開京)에 대해 배산역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를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신라의 젖줄 이오 생활 터전이었던 낙동강(洛東江)과 태백산맥이
배산역수이다. 호남의 젖줄인 금강과 차령산맥은 경주(慶州․신라)에 대해 배산역수이지
개경에 대해 배산역수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결국 호남을 배산역수로
본 것은 고려인의 시각이 아니라 신라인의 시각이었다.

금강의 역수론(逆水論)에 대해 이익(李瀷)은 좀더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금강은 반궁수(反弓水), 즉 강의 모습이 마치 개경을 향해 활을 겨냥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기 때문에 흉지(凶地)라는 것이다.(성호사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논증이다. 왜냐하면, 개경에 대한 반궁수를 따지자면 턱밑에 있는 한강이 먼저이지 600리나 멀리 떨어진 금강을 거론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를 합리화한 배산역수론을 가장 구체적으로 적시한 저술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였다. 그는 8도의 풍물과 인심을 기록하면서 유독 전라도에 대해서만은 악의적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은 반역과 요사(妖邪)와 미신과 재앙의 땅이었다.

▼후대학자들 비판 없이 수용▼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은 이중환이 8도지를 쓰면서 천하를 모두 돌아보았지만 유독 호남 땅은 밟아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여행이라면 구경거리 많은 호남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며, 설령 여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외갓집이 나주(羅州 吳氏)였기 때문에 한번쯤은 가보았음직 한데 그는 끝내 호남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그런 글을 썼다.

이중환이 호남 땅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이유는, 그가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있으면서
목호룡(睦虎龍)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告變)에 의한 것이어서 그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遊離乞食)한 다음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이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제도적 차별 정당화시켜▼
요컨대, 한국 현대사의 아린 상처를 남긴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는 오랜 역사성을 가진 집단 따돌림이었다. 호남 푸대접의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뒤집어 씌우기로 한다면 그 이전에 이미 호남 출신의 학생이나 신혼 부부들이 타지에서 하숙집이나 전셋집을 얻기 어려웠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신복룡-건국대 교수․ 정치외교사)